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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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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의 왕을 천황(일본어: 天皇 덴노[*])이라 부른다.

천황과 호칭

고대

천황이라는 칭호가 생기기 이전에 왜국에서는 천황에 해당하는 지위를 가리켜 오키미(大君)라고 불렀으며, 대외적으로는 왜왕(倭王), 왜국왕(倭國王), 대왜왕(大倭王) 등으로 칭했다.

중세

천황이라는 칭호는 율령에 규정되어, 제사에서는 ‘천자’(天子), 조서에서는 ‘천황’, 대외적으로는 ‘황제’, 신하가 직접 주달할 때에는 ‘폐하’, 황태자 등 후계자에게 양위한 경우에는 ‘태상천황’(太上天皇), 외출시에는 ‘승여’(乘輿), 행행시에는 ‘거가’(車駕) 등으로 부르는 7개의 호칭이 정해져 있었지만, 이러한 표현은 표기시에만 사용할 뿐, 어떻게 쓰더라도 읽는 것은 당시의 풍속을 따라 ‘스메미마노미코토’(すめみまのみこと)나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 등으로 칭한다. 사거한 경우에는 ‘붕어’(崩御)라고 칭하며, 재위 중인 천황은 ‘금상천황’(今上天皇)이라고 부르며, 붕어한 뒤에 시호가 정해질 때까지는 ‘대행천황’(大行天皇)으로 불린다. 배우자는 ‘황후’(皇后), 자칭은 ‘짐’(朕), 신하에게는 ‘지존’(至尊) 등으로도 불렸다.

나라 시대에는 오미노 미후네진무 천황에서부터 지토 천황 까지의 41대와 겐메이 천황·겐쇼 천황의 칭호를 일괄하여 찬진(撰進)한 것이 《속일본기》(続日本紀)에 기술되어 있지만, 이는 당대의 칭호와는 관계없는 시호일 뿐이다.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는 ‘미카도’(御門, 帝)라거나 ‘긴리’(禁裏), ‘다이리’(内裏), ‘긴주’(禁中) 등의 여러 표현으로 칭해졌다. 미카도는 원래 어소(御所, 천황의 거처)에서 천황이 드나드는 문을 가리키며, 긴리·다이리·긴주는 그 어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표현은 천황을 직접 지칭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표현이다. 폐하도 마찬가지다. 또한 ‘주상’(主上, 오카미, 슈조)라는 표현도 이용되었다. ‘천조’(天朝, 덴초)는 일본의 왕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정이나 국가, 또는 천황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스메라미코토’, ‘스메로기’, ‘스베라키’ 등 또한 사용되었다. ‘황후’는 ‘중궁’(中宮)이라고도 불렸으며, 금상천황 또한 ‘당금의 제’(當今の帝, 도긴노미카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태상천황은 ‘상황’(上皇), ‘선동’(仙洞), ‘원’(院)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출가한 경우에는 ‘법황’(法皇)이라고도 불렸다. 태상천황은 고카쿠 천황닌코 천황에게 양위한 이후에는 사실상 사라진 표현이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제도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황실전범이 퇴위에 대한 규정 없이, 천황의 붕어를 통해 황태자가 즉위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대일본제국헌법에서 처음으로 천황의 호칭이 ‘천황’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외교 문서 등에서는 ‘일본국 황제’가 많이 이용되었으며, 국내에서의 공문서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육해군의 통수권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대원수’(大元帥)라고도 불렸다.

현재

일반적으로는 일본 내의 각종 보도 등에서 천황의 경칭은 황실전범에 규정된 ‘폐하’를 채용하여 ‘천황폐하’로 칭한다. 궁내청 등의 공문서에서는 다른 천황과의 혼동을 막기 위해 ‘금상폐하’로 칭하기도 한다. 3인칭으로 경칭없이 ‘지금 천황’(今の天皇)이나 ‘현재 천황’(現在の天皇), ‘금상 천황’(今上天皇) 등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지만, 근래에는 완곡한 표현을 이용하는 것은 드물다.

지위

천황의 지위는 메이지 유신대일본제국헌법의 제정으로 일본에서 헌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대일본제국헌법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일본국헌법에서의 천황의 지위와 권한을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천황이 통치권자이자 신성한 존재로 규정되었음에 비하여, 후자의 경우에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다”고 규정된 것이다.

대일본제국헌법 체제에서의 천황의 지위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의 의사에 기초한 만세일계의 지위이다. 따라서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천황의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의율하여 중하게 처벌한다. 또한 천황은 천황대권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통치권을 총람하는 존재였다. 즉 국가의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그에 비하여 일본국헌법의 천황의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것으로, 국민주권의 원리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천황제는 절대적인 것이라거나 불가변의 것이라고 할 수 없고, 국민의 총의에 기하여 가변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인 내용면에서도 ‘신의 자손’으로 특별히 보는 규정은 없다. 권한의 면에서도 천황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국사에 관한 행위”, 이른바 국사행위만을 행할 수 있다.[1]

천황의 국가원수 여부

일본국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 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해, 천황이 일반적인 ‘국가원수’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일본의 정치#국가 원수 문서 하시오.

천황을 국가 원수로 보는 견해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이라고 규정되어 있으며, 각각 국회내각의 지명에 근거하여 행정부(내각)의 수장인 내각총리대신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한다(제6조)는 내용에 근거한다. 또한 “국권의 최고 기관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를 소집(제7조 2호)·해산(제7조 3호)하는 등, 국정의 중요한 행위를 ‘국사행위’로 수행한다고 규정되어 있다(제7조, 다만 국사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함). 또한 “전권위임장 및 대사,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제7조 5호)하고,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를 인증”(제7조 8호)하며,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제7조 9호)하는 등, 일반적으로 국가 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천황이 실시하다고 정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천황이 국가 원수라고 본다.[2]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로는, ‘천황은 국가 원수’라고 한 1990년 5월 14일의 일본 참의원에서의 내각법제국 장관의 답변이 있었다. 또한 천황을 ‘나라의 상징이며, 또 일정 부분의 외교 관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한정된 의미의 국가 원수로 표현했다. 천황 플랭카드 사건에서 도쿄 지방재판소는 ‘국가원수인 천황’이라고 표현하여 천황을 국가원수로 표현했다.

천황을 국가원수로 인정하지 않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일본국헌법 제4조에서는 천황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라고 규정되어 있고, 국사행위로 규정된 내용도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의 외교 문서를 인증하”고,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하는” 등의 의례적인 행위에 해당되어,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황위 계승

황실전범에 따르면 황위는 황통에 속하는 남계의 남자가 다음 순서에 따라 계승한다.

  1. 황장자
  2. 황장손
  3. 그 밖의 황장자의 자손
  4. 황차자와 그 자손
  5. 그 밖의 황자손
  6. 황형제와 그 자손
  7. 황백숙부와 그 자손
  8. 최근친 계통인 황족

다만 황사에게 정신이나 신체상 불치의 중환이 있거나 중대한 사고가 있을 때에는 황실회의의 협의를 거쳐 위의 순서에 따라 황위계승의 순서를 바꿀 수 있다.

천황과 세계의 관계

현재의 아키히토 천황이 즉위한 이후에 다른 국가와 천황가 사이에 문제가 빚어진 사례는 없다. 다만 쇼와 천황의 경우나 이전의 경우에는 전범 등의 이유로 좋지 않은 관계를 보여,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에는 화염병 공격을 받기도 했다. 타이부탄 왕실과는 교우가 깊다.

한국에서의 호칭

역사적으로 한국에서는 에도 막부까지는 천황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쇼군은 자신을 ‘일본국왕’이 아니라 ‘일본국 상국’(日本國相國)으로 칭했으며, 조선 또한 국왕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1407년 이후에는 쇼군을 일본의 최고 실권자로 인식하고 국왕으로 호칭하였으며, 천황의 계보를 서술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와 같은 경우에는 쇼군을 국왕으로 호칭하고, 천황은 국정과 무관한 존재로 이름만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부사였던 김성일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알현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관백’(關白)을 ‘위황(僞皇)의 정승’으로 칭하고, 천황을 일본의 최고 통치자로 인식하였다. 다만 일본의 입장에서 천황을 지칭할 때는 ‘천황’이라고 지칭하여 호칭을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종교적·의례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자리만 있을 뿐 정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함께 쇼군에 대한 호칭도 관백으로 변화하였다.[3]

주석

  1. 이상 비교 아시베 노부요시(다카하시 가즈유키 보정), 《헌법(憲法) 제4판》, 이와나미 쇼텐, 2007년, 47~48쪽.
  2. 천황을 국가원수라고 보는 경우에도 상징천황설(사토 이사오, 이토 마사미)과 천황형식대표설(다바타 시노부), 천황준원수설(고바야시 나오키) 등으로 학설은 갈린다.
  3. 〈조선시대 日本天皇觀의 유형적 고찰〉, 손승철, 《사학연구》 제50호, 한국사학회, 1995. 12, pp. 217 ~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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