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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학회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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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4일 (화) 19:2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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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感恩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통일신라 초기의 쌍탑식 절 배치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의 하나이다. 폐사되어 현재는 금당 유구와 행랑 유구, 석탑 2기만 남아있다.
감은사지는 신라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기 위해 세운 절인 감은사의 터이다. 문무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절은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대에 완공되었다. 문무왕의 유골이 대왕암에 뿌려진 후,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로 지었다. 중문, 강당, 금당이 같은 축 상에 배치되고 건물이 회랑으로 둘러쳐져 있음이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다. 또한 다른 신라 사찰처럼 금당 앞에는 탑이 쌍을 이루어 세워졌다. 발굴된 금당터 밑에는 물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공간을 통해 해룡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건물은 중심축 위에 순서대로 중문, 금당, 강당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강당 앞마당에 서로 대칭되는 두 탑을 세웠다.
탑의 모양과 형태는 신라 석탑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감은사지 석탑은 대한민국에 남아있는 석탑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탑터에서는 기와나 벽돌들이 출토되었는데, 통일신라 초기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막새무늬들은 감은사가 존재했던 시기를 추측케 한다.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