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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다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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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 1928년 11월 30일 ~ )는 일본정치인이다. 효고 현 고베 시에서 태어났다.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12선 의원이었다. 본명은 히라가나가 없는 ‘土井 多賀子’이다.

이력

일본사회당이 46석을 획득해, 새로 선출하지 않은 22석을 합쳐 총 68석으로 제1야당이 되었으며, 총 252석 중 야당이 143석을 차지해 여소야대가 되었다. 또한 사회당의 11명을 비롯해 총 22명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어 ‘마돈나 선풍’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도이 다카코가 55년간 집권했던 자유민주당을 제치고 여소야대를 이룬 것을 두고 “산이 움직였다”고 표현한 것이 유명해졌다.
여당과 야당이 역전된 참의원에서 총리로 도이 다카코를 지명해, 당시 중의원이 지명한 현직 총리는 가이후 도시키였으므로 41년만에 중의원참의원의 양원 협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양원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일본국헌법 제67조에서 중의원의 우월을 규정한 것에 따라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가 되었다.
또한 자유민주당이 도입한 소비세를 폐지하는 법안을 일부 야당과 연합해 공동으로 제출하여 12월 11일에 참의원을 통과했지만, 중의원에서 부결되었다.
“이제 하나의 산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호소하며 선거운동을 이끌어 도이 열풍을 지속시켰다. 그 결과 일본사회당이 51석 늘어난 136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회당이 단독으로 승리하자 공명당민사당이 거리를 두면서 연합정권 협의를 중단했다.
  • 1990년 자위대의 해외 활동을 인정한다고 규정된 ‘국련(UN)평화협력법안’ 부결을 주도.
  • 1991년 1월 걸프 전쟁이 임박한 이라크를 방문해 사담 후세인과의 회담을 통해 설득을 시도, 실패. 이 해에 열린 통일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회당 위원장직을 사퇴.
  • 1993년 8월 6일 여성 최초로 중의원 의장에 취임. 의원 지명시 ‘~씨’를 붙이는 것을 실행.
  • 1996년 사회당이 명칭을 바꾼 사회민주당의 당대표가 됨.
  • 1999년 11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부의장으로 취임.
  • 2002년 3월 쓰지모토 기요미의 비서관 급료 착복 사건에서 지시역을 감싼 것때문에 정책비서 고토 마사코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떠돈다. 이어 9월에 판명된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에 대한 대응 등에 반발해 다지마 요코 참의원 의원 등이 탈당하는 등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
  • 2003년 11월 9일 중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에서 납치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 오마에 시게오와 대결해 낙선했지만, 중복입후보한 비례구에서 당선. 사회민주당은 소선거구에서 1석, 비례구에서 5석을 획득해 단 6석을 획득해 책임을 지고 11월 13일 당대표직을 사임.
  • 2005년 9월 11일 중의원 총선거에 긴키권 비례대표 5번으로 입후보 해 낙선.
  • 2006년 사회민주당에서 명예 당대표의 칭호를 수여.

주요 저서

  • 『‘국적’을 생각하다』(「国籍」を考える, 지지 통신사, 1984년)
  • 『We love 헌법』(We love 憲法, 스쿠라무샤, 1985년)
  • 『도이 다카코 마이웨이』(土井たか子マイウェイ, 슛판신샤(出帆新社), 1987년)
  • 『도이 다카코 헌법강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土井たか子 憲法講義 人間が人間らしく生きていくために, 리욘샤(リヨン社), 1988년)
  • 『산이 움직인 날 도이 다카코 정론집』(山の動く日 土井たか子政論集, 스즈사와 쇼텐(すずさわ書店), 1989년)
  • 『최선 도이 다카코 반 자전』(せいいっぱい 土井たか子半自伝, 아사히 신문사, 1993년)
  • 『헌법의 남녀평등 기초 비화 (이와나미 부클릿 400』(憲法に男女平等起草秘話 (『岩波ブックレット』400), 이와나미 쇼텐, 19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