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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영국]]에서 [[입헌군주제]]와 함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주권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후 의회를 대신해 집행권을 행사하고 그 의회의 통제에 따르며 국왕의 자문에 응할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튜더 왕조]] 시대에 성립한 [[추밀원]](Privy Council)에서 내각이 분화되면서 초기에는 국왕이 주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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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영국]]에서 [[입헌군주제]]와 함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주권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후 의회를 대신해 집행권을 행사하고 그 의회의 통제에 따르며 국왕의 자문에 응할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튜더 왕조]] 시대에 성립한 [[추밀원]]({{lang|en|Privy Council}})에서 내각이 분화되면서 초기에는 국왕이 주재하였다.
  
[[1714년]]에 [[조지 1세]]가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되었고, [[1721년]]에는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이 조지 1세의 신임에 따라 각의를 주재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는 동시에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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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에 [[조지 1세]]가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되었고, [[1721년]]에는 [[로버트 월폴]]({{lang|en|Robert Walpole}})이 [[조지 1세]]의 신임에 따라 각의를 주재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lang|la|Primius inter pares}}, {{lang|en|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는 동시에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782년]]에 [[프레드릭 노스]]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따라 총사직하고, [[1783년]]에는 [[윌리엄 피트]]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대해 하원의 해산을 단행한 뒤 [[1784년]]의 총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이후에 의회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과 내각의 의회에 대한 해산의 관행이 정착하면서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ref>홍성방, 헌법학, 현암사, 2007년, 709~710쪽.</ref>
 
[[1782년]]에 [[프레드릭 노스]]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따라 총사직하고, [[1783년]]에는 [[윌리엄 피트]]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대해 하원의 해산을 단행한 뒤 [[1784년]]의 총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이후에 의회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과 내각의 의회에 대한 해산의 관행이 정착하면서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ref>홍성방, 헌법학, 현암사, 2007년, 709~710쪽.</ref>

2018년 4월 2일 (월) 20:45 기준 최신판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란 내각(집행부)의 존속이 의회의 신임에 의존하는 정부 형태로, 내각이 의회에 의해 구성되고 또한 의회에 대하여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특징이다.

역사

17세기영국에서 입헌군주제와 함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주권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후 의회를 대신해 집행권을 행사하고 그 의회의 통제에 따르며 국왕의 자문에 응할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튜더 왕조 시대에 성립한 추밀원(Privy Council)에서 내각이 분화되면서 초기에는 국왕이 주재하였다.

1714년조지 1세가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되었고, 1721년에는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이 조지 1세의 신임에 따라 각의를 주재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는 동시에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782년프레드릭 노스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따라 총사직하고, 1783년에는 윌리엄 피트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대해 하원의 해산을 단행한 뒤 1784년의 총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이후에 의회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과 내각의 의회에 대한 해산의 관행이 정착하면서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1]

유형

고전적 의원내각제

고전적 의원내각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영국과 같이 내각과 의회의 다수파가 형식적으로 일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형태인 영국형 의원내각제(이른바 내각책임제)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제3·4공화국과 같이 강한 의회와 약한 내각을 특징으로 하는 프랑스형 의원내각제이다. 프랑스형 의원내각제의 경우 수상이 행정을 담당하고, 대통령은 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는데 의회는 정부에 대하여 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정부는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 것이 관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외견적 의원내각제

이원정부제 문서 하시오.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프랑스의 제5공화국과 같이 이원정부제적 요소를 가진 의원내각제를 말한다.

건설적 의원내각제

건설적 의원내각제는 통제된 의원내각제라고도 하는데, 독일 기본법과 같이 강한 정부와 약한 정부를 기초로 한다. 이 경우 의회가 의결을 통해 후임 수상을 선출하지 않은 경우에는 현 수상에 대하여 불신임을 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특색

의회의 다수파에 의하여 정부가 구성된다. 이는 민주적 정당성을 일원화해 주는데, 집행부의 장인 수상이 의회에 의하여 선출되고 수상이 인선하는 각료가 수상의 정책노선을 따라 구체적으로 집행업무를 담당한다. 이 경우 수상과 함께 내각 전체가 의회에 대하여 정치적인 책임을 진다.

장점

내각의 존속과 진퇴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에 의존하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강하며, 민주적 요청을 만족시킬 수 있다. 또한 내각이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짐으로써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또한 내각의 의회해산권과 의회의 내각불신임권은 서로의 정치적 대립을 해결하는데 주효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내각이 입법부에 대하여 신임을 얻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기용할 확률이 커진다.

단점

의원내각제의 경우 소수의 의석을 가진 여러 정당이 난립하는 경우에는 연정을 구성할 수 밖에 없고, 이때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다. 또한 의회가 정권의 탈취를 위한 정쟁의 장소로 악용될 수 있으며, 내각의 존속이 의회에 좌우되기 때문에 강력한 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각과 원내 다수파가 합세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다수결의 횡포를 가져올 수 있으며, 견제장치를 마련하기가 곤란하다.

주석

  1. 홍성방, 헌법학, 현암사, 2007년, 709~710쪽.